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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Movie

[영화 리뷰]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서울의봄", 출연진 및 실화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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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12.12: The Day

2023년 개봉

김성수 감독

황정민, 전두광 역

정우성, 이태신 역

이성민, 정상호 역

박해준, 노태건 역

김성균, 김준엽 역

(스포 포함)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을 극화하였습니다.

시종일관 무겁고 기 쎈 남자들의

한판승부가 이어집니다.

이름이 유사하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역사속 인물을 비슷하게 연기하려고 하지 않아서,

그냥 창작된 영화처럼 잘 짜여진 각본과

배우들의 충실한 연기력이 합쳐져서

아주 재미나게 볼 수 있는 영화로 탄생하였습니다.

1979년 12월12일 부터 13일 새벽까지의 9시간을

재구성하였습니다.

각 사건의 전개는 실제 벌어진 일을 바탕으로 하지만,

인물간의 대화와 디테일한 사건의 전개는 픽션으로 구성하였습니다.

12.12 군사반란의 역사적 심판을 위해

인물들을 악마화 하거나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아서

영화로서 몰입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 전두광(전두환)은

인맥관리에 철저하여 선, 후배에게 부족함이 없고

결단력과 대담함을 갖추었습니다.

육군참모총장 정상호(정승화)는 전두광의 계략을 눈치채지 못했고,

이를 막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수경사령관 이태신(장태완),

특전사령관 공수혁(정병주),

육군본부 헌병감 김준엽(김진기)에게는

모두 자신들의 결연한 의지를 뒷받침해줄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다른 군인들은 무능하거나

심증적으로 다시 군인의 세상이 오는 것을

거부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군사반란이 있던 그날이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긴장감이 넘쳤던 이유는

옳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막아내려고 애쓴 군인정신을 갖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후손들이 볼 때

우리 역사가 부끄럽지 않도록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목숨걸고 행한

그분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래 실제 인물들의 기록을 참고로 찾아보았습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1929~2002)

10.26 사태 이후 실질적 최고 권력자인 계엄사령관이 되었으나,

전두환이 일으킨 12.12 군사반란에 당해 이튿날인 12월 13일 해임되었고,

강제 예편당해 보충역 이등병으로 강등당함과

동시에 국군보안사령부로 강제 압송되었다.

모진 고문 후 결국은 석방되었지만 이미 모든 실권은 전두환에게 넘어간 뒤였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 사건에 대해 크게 분노를 하고 신군부를 제압하려고 계획을 세우지만

그들만으로 신군부 세력들을 막을 수 없었고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마저 믿었던 부하들에게 잡히고 만다.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후 기소되어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모욕적으로 고문을 동반한 수사를 받았다.

그리고 1980년 3월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의 판결에 의해

10년형을 선고받으면서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자그마치 17계급이나 강등당하는 굴욕적인 처분을 받으며

불명예 전역(강제 예편)해야 했다.

그간 받은 장교 급여분도 이등병으로 동일 기간을 복무할시 받을 돈을 제외하고

전부 몰수당하고 군인연금 수혜 권리도 박탈되어 경제적인 위기도 겪었다.

이후 남한산성에서 형기를 채우다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여

조용히 지내다가 세간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생기니 1987년 대선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로 치러지게 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는

야당김영삼과 김대중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고

재야 진보 진영에서 백기완까지 출마하면서 야당표의 분산으로

노태우 당선이 유력하였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김영삼의 삼고초려 끝에

1987년 대선 직전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 겸 부총재로 영입되어

정계에 전격 등장했다.

공식 선거 운동 시작 직후 김영삼이 정승화를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하자

김영삼의 지지율이 1위로 치솟았다.

그러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터지고

선거 전날 김현희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면서

엄청난 북풍이 불었고 결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노태우 36%, 김영삼 28%, 김대중 27%, 김종필 8%

여당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의 당선으로 마무리되었다.

노태우가 당선되자 정치에서 손을 떼었으며 그 후 이등병으로 강등된 예비역 장군들의 계급 복권 대상에 포함되어 예비역 육군 대장의 자격을 되찾았고

몰수됐던 급여와 군인연금 수급권도 돌려 받았다.

1988년 시작된 대한민국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는

12.12 군사반란 당시의 피해자이자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하여

사태의 전말을 직접 증언했다.

1995년에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 사건

1987년 제정된 헌법 이후 최초로 발생하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증언하였다.

전두환이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 평생의 한을 푸는 듯 했으나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면 복권되자

"반성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래도 풀어준다니 이 나라가 진정으로 법치주의 국가입니까?"

라며 분노를 표시했다.

1999년 70세때인 육해공군 및 해병대 장성 출신 모임인

성우회 제6대 회장에 당선되어 쿠데타 피해자 출신 예비역들의

권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임기 중이던 2002년 향년 73세로 사망했다.

사후 2002년 6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에 예비역 대장 자격으로 안장되었다.

출처: 나무 위키

장태완 (이태식) 수경사령관 (1931~ 2010)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12.12 군사반란 당시 서울에 있던 부대 중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헌병감, 비록 국방부 명으로 회군한 윤흥기 9공수여단장과 함께

쿠데타에 끝까지 저항한 군인이다.

전두환의 간계에 의해 동료 장군 한명과 연희동에 있는 요정(고급 술집)으로 초대받아

가볍게 술 몇 잔 기울이던 중,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신군부 쿠데타에 불법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길길히 날뛰며 수도경비사령부로 급히 달려간다.

그러나 그가 부대에 도착했을 때에는

사전에 치밀하게 작당한 대로 움직인 반란군에 의해 상황은 매우 안 좋았고

전황은 신군부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던 중이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관저에 즉각 경비 병력을 보내 구출을 시도하는 한편

대한민국 육군본부에서 피난 온 육군 수뇌부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작전을 논의,

30경비단은 이미 반란군 수뇌부의 베이스가 되었기에

그나마 운용이 가능한 33경비단의 전차 중대를 기습적으로 보내

경복궁에 모여 있던 반란군 일당을 쓸어 보려고 하기도 하였다.

장태완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전화하여

"시간이 촉박하니 9공수라도 빨리 반란군 수뇌부들을 공격해야 된다"라고 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진압군의 사실상 유일한 희망이던 9공수에게

"반란군 본거지인 30경비단과 보안사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신군부는 당황했는데 1공수, 3공수 등 반란 공수부대보다

9공수가 교통요건이 더 좋아 서울에 더 가까이 있어서

이를 가만히 둘 시 본거지에 들이닥쳐 자신들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태완은 포병대와 연락해서

30경비단과 보안사에 포를 겨누고 명령이 오면 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진압군 수뇌부는 너무 순진했는지 최대 실책을 저지른다.

'반란군부가 1,3공수 회군시킬테니 진압군도 9공수를 회군시키자'라는

일명 '신사 협정'을 체결 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자신들을 칠 수 있던 유일한 군부대였던 9공수가 본대로 되돌아가자

하나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협정을 지키지 않고 바로 1공수로 하여금

대한민국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라고 지시,

3공수로 하여금 특전사령부를 공격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육군본부와 국방부는 1공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3공수에게 체포당했다.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

정병주 사령관을 지키려고 처절하게 응사했지만

반란군의 총격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렇게 그나마 남은 우군이었던 육본과 국방부도 점령당하고

특전사령부까지 반란군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마지막 남은 건 수경사 뿐이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마지막 수단으로

행정병, 취사병, 자기 휘하에 있는 극소수 전투병, 남은 전차 중대 4대를

소집하고 보안사를 직접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누가 어디에서 배신할지,

특히 "전차부대마저 배신하면 병사들이 다 죽는다"는 장교들의 설득,

하나회의 도청, 반란군에게 항복한 국방장관 노재현의 지시,

최후로는 하나회 출신이자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 중령이

헌병단을 접수하고 수경사 수뇌부에 들이닥치자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더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체감하여

자기 사령관실로 들어간 후

자신의 부하이자 배신자인 신윤희에 의해 곧 체포된다.

장태완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끔찍한 일을 겪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탄하고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결국 1980년 4월에 과음으로 별세했다.

설상가상으로 1982년에는 외동아들 장성호(당시 21세)가 행방불명됐다.

12.12 군사반란이 터질 때 장성호는 중경고등학교 학생이었으며

가택 연금에 보안 요원들이 자꾸 돌아다니는데도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입학했고

1982년 자연대 수석을 차지했다.

장성호는 평소처럼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대문을 나선지

1달만에 칠곡군 왜관읍 근처에 있는 산기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후 1994년에 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경선에서 승리한 후 2회 연속으로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에 당선되었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이 5·6공화국 정권 비리 및 12.12 군사반란, 5.17 내란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과 노태우를 잡아들이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두 사람과 같은 법정에 서기도 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의 인재 영입에 따라

비례대표 제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전두환 덕에 공기업 사장을 했음에도

새천년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 됐고

집권 여당 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또한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2002년제16대 대통령 선거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훈특보를 맡기는 했지만

후보 단일화 협의회에 참여해서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주장하였고

결국 노무현 후보로의 단일화에 승복하였다.

열린우리당새천년민주당의 분당 이후

새천년민주당의 당론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에 찬성하기도 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며 은퇴 선언을 하고

2010년 별세할 때까지 민주당 고문직을 맡았다.

출처: 나무위키

김진기 헌병감 (1932~ 2006)

1979년 육군본부 헌병감으로 재직 중

10.26 사건 당시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체포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범이 김재규임을 알게 된 정승화는

육군 벙커로 김진기를 불러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으로 위장시킨뒤

김재규를 체포해 국군보안사령부에 인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김진기는 김재규를 유인하여

헌병 중대장 이기덕 대위, 국군보안사령부 오일랑 중령과 함께 체포해

국군보안사령부로 인계했다.

이후 같은 해 계엄 선포 이후 계엄사령부 치안처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치안처장 재직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정보 독점 월권 행위로 인해

치안처 및 헌병대에 정보가 오지 않자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

전두환의 월권 행위에 대한 보고를 하기도 했다.

1979년 12월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진압하려 하였다.

당시 그는 신군부에 의해 친정승화 계열로 분류되어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함께 연희동 위장 만찬에 유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헌병감실에 연희동 음식점 번호를 알려놓고 나와

정승화 총장이 불법 연행되었을 때 연락을 받아 다른 장군들에게 알렸다.

육군본부로 복귀한 후 보고를 통해

전두환 등 하나회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인지했고,

이에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체포 승인을 받기 위해 총리공관에 머물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직속 부하인 총리공관 헌병 특별경호대장 구정길 중령에게

명령하지만 헌병 경비 병력들이 하나회 병력인 대통령 경호실 병력에 의해

무장해제되며 실패한다.

김진기는 휘하의 헌병 병력을 이용해

최규하 대통령을 구출하려 했지만

하극상으로 인한 병력 부족으로 좌절된다.

그 뒤 수도경비사령부 지휘부에서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 무장해제된다.

국군보안사령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1980년 예비역 준장으로 자진 예편한다.

다른 진압군측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김진기도 하나회에 소속된 부하들에게 하극상을 당했다.

전두환의 명령으로 정승화를 체포한 우경윤 범죄수사단장(대령)과

성환옥 헌병감실 기획과장(대령) 모두 직속 부하였다.

애초에 그들이 전두환의 명령으로 정승화를 체포하지 않았더라면

12.12 군사반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별개로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를 연희동 만찬으로 유인했던 조홍 헌병단장은

병과 후배로 이미 후임자로 내정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 배신으로 인해 김진기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후에 그는 "평생을 쿠데타의 악몽에 시달렸다"라고 밝혔다.

김영삼 정부 때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1993년 이건영, 하소곤, 정승화 등과 함께 전두환을 내란죄 등으로 고발했다.

2006년 지병으로 사망한 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출처: 나무위키

정병주 특전사령관 (1926~1989)

1979년 12월 12일, 그 유명한 12.12 군사반란 당시에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서울 근방 부대 중 쿠데타에 반기를 든 3명의 장성 중 1명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정병주 자신에게는 그야말로 군인으로서

가장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을 맞고 말았다.

사실 보안사하나회 소속 장교들은 12.12가 일어나기

1주일 전부터 만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체포하고

친(親) 정승화 계열의 군인들인 정병주, 김진기 그리고 장태완 등 3인이 저항하지 못하게

술자리에 초대하고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 조홍 수경사 헌병단장을 동석시켜

그들의 발을 묶어놓는 모략을 꾸몄다.

그리고 1979년 12월 12일이 왔다.

정병주 사령관은 김진기, 장태완과 술자리를 같이 하다가

전두환이 안 와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승화 총장이 납치되었다는 걸 듣게 된다.

그들은 술자리에서 일어나 각각 수경사, 육군본부 그리고 특전사로 돌아갔지만

돌아가서 보았을 때는 이미 태반이 보안사 쪽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정병주도 특전사령부로 돌아와서 누가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기가 가장 아꼈던 부하들 박희도 제1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제3공수특전여단장 그리고 장기오 제5공수특전여단장이

반란을 일으킨 보안사와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충격을 먹었다.

육사 후배들에게도 배신당했고

자기 직속부하인 여단장들에게까지 배신당해서 충격이 컸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잡고 대응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특전사 부사령관 이순길 준장을 시켜 1공수를 막으려 했다.

또,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병력 출동을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믿을 수 있는 병력이 현재 없다."라고

전화하자 정병주는

"나에게는 9공수가 있다. 9공수 윤흥기 준장하고 참모장은 갑종 출신이라서

그들하고 연줄이 하나도 없다. 9공수라도 빨리 출동을 시키겠네."

라고 하고 곧바로 9공수 윤흥기 준장에게

보안사와 경복궁에 있는 30경비단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9공수는 출동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은 하나회와 보안사가 감청망을 통해 알게 되고

그냥 놔두면 자신들의 반란이 성공하지 못 할거라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그들은 제3공수특전여단장인 최세창에게 정병주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최세창은 그래도 자기 상관인 정병주를 어떻게 회유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0분 후,

예하부대 대대장박종규 중령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특전사령부 사령관실이 3공수내에 있었고

특전사령관 직속 전투병력이 없어서 박종규 대대장과 15대대 체포조는

아주 쉽게 사령관실을 공격할 수 있었다.

사령관 비서실장인 김오랑 소령은 하나회의 회유를 거부하고

단신으로[18]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사령관실로 정병주를 피신시켰다.

그리고 반란군들이 특전사령관실에 도착한 후

김오랑은 권총으로 반란군과 교전 중 전사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반란군에게 체포당한다.

그때, 9공수는 자기들의 사령관이 피격당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보안사와 경복궁 30경비단을 공격하기위해 갔다가

신사협정에 속은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돌아간다.

반란이 끝난 후, 정병주는 강제 예편당하게 된다.

그렇게 강제예편된 이후 그는 꾸준히 12.12 사태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해 왔었다.

그러다가 1988년 10월 16일 밤 10시에 갑자기 행방불명되었고

결국 실종 139일 만인 이듬해 3월 4일에 송추 인근 야산에서 목매달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당국은 그가 자살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었으나,

정병주 소장과 친분이 깊었던 장태완 소장은

계속해서 그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는 주장을 해 왔다. 고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 교리에서 자살은 용서받지 못 할 큰 죄 중 하나다.

살벌한 제5공화국 때에도 장태완 소장에게 '12ㆍ12의 진상규명에 조력하겠으며,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남아야 하니 서로 몸 조심하자'고 말하는 등

자살을 택할 인물도, 정황도 아닌 것이 그 이유.

민주화 이후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재조사가 이뤄졌지만,

조사 결과 자살로 분류하긴 의문점은 있지만

당시 증거물이 거의 없어 사실상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김오랑 중령의 부인 백영옥 여사가 남편의 죽음에 충격으로 쓰러져 실명하고

고생이 많을 때 정병주는 손수 찾아가 위로하면서

남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죽고 난 다음에는 되려 백영옥 여사가 뜻을 이어받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그녀마저도 1991년 6월 28일에 평소 봉사활동을 하던 시설에서

추락사한 채 발견되었다.

당시 경찰은 실족사를 주장하였으나, 의문은 있다.

고인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고인의 무덤은 백비. 비석의 내용이 없이 그냥 이름만 적혀있다.

무명 용사들도 공적을 기리는 한 줄의 비문이 항상 적혀 있게 마련인 무덤에서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으로, 이는 유족들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식들의 말에 따르면 말버릇처럼 자신이 죽은 후에도

김오랑의 묘소에 참배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https://youtu.be/-AZ7cnwn2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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