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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Movie

[영화 리뷰] 우리 역사의 빛나는 스타 세종대왕, 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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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 하늘에 묻는다 Forbidden Dream

2019년 개봉

허진호 감독

최민식, 장영실 역

한석규, 세종대왕 역

신구, 영의정 역

김홍파, 이천 역

허준호, 조말생 역

김태우, 정남손 역​

조선의 제4대왕 세종시대의 영화입니다.

조선시대 역사와 관련된 영화를 시작하였는데,

이번이 세편째입니다.

앞의 두편에서 왕권이나 조선이 처한 현실이

비참하기 짝이없어 보는 내내 우울하였습니다.

이제야 그래도 마음편히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세종대왕이 없었으면 어떠했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한 것 같습니다.

이 블로그를 한자로 썼을까? 영어로 썼을까?

우리 역사에서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는게 정말 다행입니다.

게다가 정치인(왕)중에서도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이 있었다니,

앞으로도 또 존경할수 있는 정치인이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영화는 천민출신으로 궁에서 정식 직책을 받은 입지전적인 인물인

장영실과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장영실이 갑자기 역사서에서 자취를 감춘 이유를

상상력을 발휘하여 전개하였습니다.

장영실과 세종대왕이 이룬 천체관측에 대한

발전을 주내용으로 합니다.

(스포 포함)

장영실은 명나라에서 가져온 그림을 바탕으로

눈썰미와 손재주로 물시계를 완벽히 만들어내어 세종의 신임을 받습니다.

관노 출신이지만 관직을 하사받고,

세종과 함께 천체관측기구를 만들어

조선만의 시간과 절기등을 기록하는등 천문학의 발전을 이룹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온 사신이 이를 트집잡고,

천체관측기구를 다 부수고, 장영실을 명나라로 압송하기로 합니다.

세종은 안여파손 사건을 빌미로 장영실을 잡아들여

그의 명나라 압송을 막아내지만,

세종의 한글창제를 철회시키려는 영의정은

세종과 거래하여 장영실을 풀어주는 대신 한글 반포를 포기하기로 합니다.

이를 눈치챈 장영실은 스스로 반역의 죄를 받고

세종이 한글 반포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세종 1397년 ~ 1450년

[ 世宗 ]

세종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418~1450년이며,

1418년 6월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세종대는 우리 민족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이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졌다.

또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이 공고해졌다.

훈민정음 창제는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능호는 영릉으로 여주시에 있다.

세종의 즉위 과정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개와 매[鷹]에 관계된 사건을 비롯해,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선위에 대한 마음이 동요되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세자 양녕대군에게서 떠난 것을 알게 된 신료(臣僚)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疏)를 올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해

택현(擇賢)의 명분을 주어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유산임에 분명하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길러 낸

최항(崔恒) · 박팽년(朴彭年) · 신숙주(申叔舟) · 성삼문(成三問) · 이선로(李善老) · 이개(李塏) 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우리 민족의 문자를 창제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 시대의 문화 의식과 수준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기술서적의 편찬

이 시기는 과학과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크게 발전을 보았다.

천문대와 천문관측기계 방면에서의 발전이 이러한 측면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 초기 서운관에는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에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한 바 있으나,

이것은 아주 미흡한 것이었다.

세종 14년부터 시작된 대규모의 천문의상(天文儀象)의 제작사업과 함께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높이 약 6.3m, 세로 약 9.1m, 가로 약 6.6m의 석축간의대가 세종 16년에 준공되었다.

그리고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 · 혼상(渾象) · 규표(圭表)와 방위(方位) 지정표(指定表)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치되었다.

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이러한 간의대와 그 중요한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의 영향과 전통적인 요소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혼천의는 천체관측기계로서

문헌상으로는 세종 15년 6월에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는데,

정초(鄭招) ·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전(古典)을 조사하게 하는 한편,

장영실(蔣英實) 등 기술자들에게 실제 제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天球儀)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해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과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서 일종의 천문시계의 성격도 가졌다.

또한,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와 물시계도 제작되었다.

해시계로는 앙부일구(仰釜日晷) · 현주일구(懸珠日晷) · 천평일구(天平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다. 그리고 물시계로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가 있다.

앙부일구는 우매한 백성들을 위해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쪽의 거리에 설치한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公衆時計)였다.

또한,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휴대용 시계였으며,

정남일구는 매우 정밀한 해시계로

이것으로 관측하면 자연히 남쪽이 정해지면서 시각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시계는 갠 날과 낮에만 쓸 수 있는 것이므로,

공적인 표준시계로는 물시계가 더 유용했는데 자격루가 그것이다.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물시계인 자격루는 세종이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장영실을 특별히 등용해 이의 제작에 전념하게 해 세종 16년에 완성하였다.

그것은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조선시대의 표준시계로 이용하였다.

세종 20년에는 장영실에 의해 또 다른 자동물시계이며 천상시계인 옥루가 완성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종 [世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영실

[ 蔣英實 ]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보다 뛰어나서,

매일 강무(講武)할 때에는 나의 곁에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15년 9월 16일)

장영실의 신분은 동래현(東萊縣)의 관노(官奴)였다.

그의 과학적 재능으로 태종 때 이미 발탁되어 궁중기술자 업무에 종사하였다.

제련(製鍊) ·축성(築城)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으며

1421년(세종 3) 세종의 명으로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다. 1423년(세종 5) 왕의 특명으로 면천(免賤)되어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가 되면서

관노(官奴)의 신분을 벗었고 궁정기술자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행사직(行司直)이 되고 1432년 중추원사 이천(李狀)을 도와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天文儀) 제작을 감독하였다.

1433년(세종 15) 정4품 호군(護軍)에 오르고 혼천의(渾天儀) 제작에 착수하여 1년 만에 완성하고

이듬해 동활자(銅活字)인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의 주조를

지휘감독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報漏閣)의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1437년부터 6년 동안 천체관측용 대 ·소간의(大小簡儀),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天平)일구,

고정된 정남(定南)일구, 앙부(仰釜)일구, 주야(晝夜) 겸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欽敬閣)의 옥루(玉漏)를 제작 완성하고,

경상도 채방(採訪)별감이 되어 구리(銅) ·철(鐵)의 채광 ·제련을 감독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영실 [蔣英實]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이순지 ~1465

[ 李純之 ]

그는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한 뒤

정인지(鄭麟趾)·정초(鄭招)·정흠지(鄭欽之)·김담(金淡) 등과 같이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저술하였다.

이 『칠정산내외편』의 완성으로 조선의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그 뒤 역법의 계산은 주로 이순지와 김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또, 이천(李蕆)·장영실(蔣英實)과 함께 천문의상(天文儀象)들을 교정, 제작하였으며,

1445년에는 그때까지 조사, 정리된 모든 천문관계 문헌과 이론을 체계화하여 『제가역상집』 4권 3책을 펴내었다.

또, 1457년에는 세종대에 정리되었던 일월식(日月蝕)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고 김석제(金石悌)와 함께 그 법칙을 외우기 쉽게 산법가시(算法歌詩)를 짓고

사용법 등을 덧붙여,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2권 1책을 완성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순지 [李純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천1376 ~ 1451

[ 李蕆 ]

1393년(태조 2) 하위무관직인 별장(別將)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섰다.

1402년 무과 초시에 급제하고, 1410년 무과 중시에 각각 급제하여

동지총제(同知總制) ·충청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1415년 공조참판으로 부임하여 황해도 일대 은광(銀鑛) 개발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419년 우군부절제사가 되어 대마도 정벌에 가담하였다.

그 공적으로 좌군동지총제가 되었으며 경상해도 조전절제사가 되어 경상도로 파견되었다.

1420년 충청도 병마도절제사가 되었고 세종의 명을 받아 경자자(庚子字)를 만들고,

도성을 보수하는 역을 겸직하였다.

표준저울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였고 중국에서 견문한 사륜차를 개발하였다.

1431년에는 근정전의 화재에 대비하여 갈고리를 장치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군선(軍船)을 개량하고 노궁(弩弓)개발하였고 악기를 개선하였다.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간의(簡儀) ·혼의(渾儀) ·앙부일구(仰釜日晷) 등 천문기구의 제작을 지휘했다.

1437년 평안도 도절제사로서 여진족을 토벌하고 4군의 설치를 건의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그해 10월 노모 염씨를 만나기 위해 귀향하자 세종은 그를 위한 잔치를 베풀어 줄 정도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1440년 이천이 수비를 담당했던 북방에 여진족이 침략하여 노략질을 재차하자

국경수비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천안으로 귀양을 갔다.

1441년에 방환되고 1442년 산릉수리도감 제조가 되어 건원릉 수리를 담당하였다.

1443년 중추원사가 되고 화포와 무기 등을 개량하였다.

1445년 세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강에서 함포를 사격하는 수군훈련을 실행하였다.

1450년 정2품 벼슬인 판중추원사에 올라 세종으로 부터 궤장을 하사 받았다.

이천은 무신으로서 요직을 역임하면서 세종 대의 과학기술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뇌물과 관련되어 세종의 질책을 받았고 부정이 많이 드러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천 [李蕆]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https://youtu.be/sFxaOXKWGW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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