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The Fortress
2017년 개봉
황동혁 감독
이병헌, 최명길 역
김윤석, 김상헌 역
박해일, 인조 역
고수, 서날쇠 역
박희순, 이시백 역
조우진, 정명수 역
조선의 제16대왕 인조시대의 영화입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왕이 되었지만,
정묘호란, 병자호란에서 패했고,
자신의 장남을 정적으로 여겨서 제거한
무능한 왕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영화에서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서
항복을 권하는 신하 최명길(이병헌)과
결전을 권하는 신하 김상헌(김유석)사이에서
제대로 된 결정도 하지 못하고,
백성을 위하는 모습도 없고, 오로지 본인의 안위만 걱정하는 모습입니다.
제대로 된 군사도 없이
무조건 명에 대한 사대만 주장하는 신하들의 모습이
오늘날의 정치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정책이나 미래를 위한 준비는 없이
서로를 깍아내려 표만 받으려 하는 오늘의 정치인들의 모습이
이 옛날의 조선시대의 신하들에서 부터
내려온 오랜 역사라고 생각하니 우울합니다.
우리 역사에 없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사람들은 아무 목소리도 못내는 현실입니다.
이 나라가 다시 외세에 비굴해 지는 날이 와도
그들은 본인들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누구 때문이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하겠지요.
결전을 원하는 사대부들을 따랐던 인조는
결국 전투에서 대패하고
청의 황제에게 항복하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인 삼궤구고두례를 하게 됩니다.
만주어로는 '일란 냐퀀 우윤 헝킨 이 도로'(ilan niyakūn uyun hengkin i doro,
세 꿇기와 아홉 조아리기의 예)라고 표현했다.
'삼배구고두례'[1]도 같은 말이다.
영화내내 비좁은 임시궁궐에서 초췌한 왕의 모습을 보는
마음이 찜찜합니다.
그 와중에도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명에 충성하여 청과 항쟁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결기가 처량합니다.
왕은 그 안에서 결연히 저항하는 것도
세계사의 흐름을 꿰뚫어 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도
어느것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청의 황제에게 무릅을 꿇고 머리를 조아립니다.
조선 역사를 다루는 영화들이 한결같이
처량하고 우울하고
우리역사에 대한 자존감이 곤두박질입니다.
다음번에는 조선 역사의 좋은 시절을 다룬 사극을 봐야겠습니다.
인조 1595 ~ 1649
[ 仁祖 ]
조선의 제16대 왕(재위 1623~1649).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 정책을 썼다.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해 총융청 · 수어청 등을 신설했으며,
북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을 신설했다.
송시열 · 송준길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했다.
1623년 김류(金瑬)·김자점(金自點)·이귀(李貴)·이괄(李适) 등 서인(西人)의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올랐다.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일시 공주(公州)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張晩)이 이를 격파한 뒤 환도하였다.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을 썼으므로,
1627년 후금의 침입을 받게 되자 형제의 의(義)를 맺었는데, 이것을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정이 은연중 친명적(親明的) 태도를 취하게 되자,
1636년 국호(國號)를 청(淸)으로 고친 태종이 이를 이유로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淸軍)에 항복,
군신(君臣)의 의를 맺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였는데,
이것을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의 내란·외침으로 국가의 기강과 경제상태가 악화되었는데도
집권당인 서인은 공서(功西)·청서(淸西)로 분열되어 싸웠고,
김자점이 척신으로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았다.
이이(李珥)·이원익(李元翼)이 주장한 대동법을 실시했으며,
여진족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국경지대인 중강(中江)·회령(會寧)·경흥(慶興) 등지에 개시(開市)하여
그들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였다.
1634년 양전(量田:토지조사)을 실시하여 토지제도를 시정하였으며,
연등9분(年等九分)의 법을 정비하여 세제(稅制)를 합리화하였다.
1645년 볼모생활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죽자 조정은 세자 책봉 문제로 시끄러웠으며,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세자빈 강씨(姜氏)를 사사(賜死)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난국 속에서도 군제(軍制)를 정비하여 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 등을 신설하였으며,
북변(北邊)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鎭)을 신설하였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육(金堉)·김집(金集)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능은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장릉(長陵)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조 [仁祖]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최명길 1586 ~ 1647
[ 崔鳴吉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인조반정에 참여한 반정공신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를 주관하여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대명, 대청 외교를 맡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정을 주도했다.
명과의 비공식적 외교관계가 발각되어 1643년 청나라에 끌려가 수감되기도 했다.
그의 사상과 정책은 주화론으로 요약할 수 있으나 양명학에도 큰 호감을 보였다.
광해군대에 북인의 권력독점이 심화되던 중 1614년(광해군 6) 병조좌랑에서 삭직되었으며,
북인의 독주가 선조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에 이르게 되자
이귀(李貴)가 중심이 된 반정계획에 참여하였다.
그 후 김류(金瑬) 계열과의 연합을 통한 반정이 성공하자 이조좌랑이 되고
그 해에 이조참판과 비변사 제조까지 승진하였으며,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녹훈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치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의 극복에 공헌하고,
1632년(인조 10) 이후 예조 ·이조 ·호조의 판서와 예문관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636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조판서에 다시 올라 병자호란에서 강화를 주관하였다.
난중의 일처리로 인조의 깊은 신임을 받음으로써
1637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는 영의정에 올라,
대청 ·대명 외교의 복잡한 문제에 대처하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정을 주도하였다.
일찍 사이가 벌어진 김류 ·김자점(金自點) 세력과의 경쟁으로 1640년에 일단 물러났다가
2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지만,
임경업(林慶業)을 통해 승려 독보(獨步)를 명나라에 보내
비공식적 외교관계를 유지한 일이 발각되어 1643년에 청나라에 끌려가 수감되었다가,
1645년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풀려났다.
동료 공신들의 경제적 비리행위를 규탄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데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강직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에는 무신이 아닌데도 위험 속에서
홀로 임진강을 건너 원수 장만(張晩)을 찾아갔고,
계책을 세워 안현(鞍峴) 전투를 승리로 이끎으로써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병자호란 초기에 청나라의 기동대가 들이닥쳤을 때는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적장에게 침략을 항의함으로써
인조와 백관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었다.
병자호란 후에도 스스로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대청 외교에서 패전국으로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당당한 자세로 해결하여 나갔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주로 정적들이 편찬한 《인조실록》에서도 곳곳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구체적인 정책은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개혁을 추구하되
시세의 변화에 따라 변통하는 방향으로 추진하였다.
후금 및 그 뒤의 청나라에 대해서는 유연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충돌을 피하고
우리의 입장을 지키자는 주장으로 일관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못하다가
하루 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魚肉)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존하겠느냐”
는 입장에서 강화를 주장하였지만,
자신이 쓴 항서를 찢는 척화파 김상헌(金尙憲)의 행동에도 의미가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독단에 빠지지 않았다.
또한 인조가 대원군 신분인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왕으로 추존하는 정책을 펼 때 대부분의 사림들이
공과 사의 분별을 내세워 반대하였으나
임금의 입장을 존중하는 소수 의견에 가담하여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항상 임금만을 따른 것은 아니어서 1646년 인조가 소현세자빈을 처형할 때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일반 사류들과 함께 그녀를 용서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5년(인조 3)에 관직체계 ·토지제도 ·군사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안을 제출한 데 나타난 개혁 의지는
병자호란 후 국정을 주도할 때 실행에 옮겨졌다.
정치운영에 대해서는 관인들 사이의 분란 가능성을 줄이고
재상의 권한을 확대함으로써 정치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민생에 대해서는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민간의 부담을 균등히 하려는 것이었다.
주화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과 정책은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던 시대 분위기에 밀려
인조 말년 이후 거의 모두 부정되고 자신도 소인배나 불길한 인물로 폄하되었다.
그러나 국가와 민생을 위해 개인의 위험을 돌아보지 않는 헌신과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간 공로에 대한 찬사도 계속되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손자이자 숙종대에 영의정을 지낸 소론의 지도자인
최석정(崔錫鼎) 등을 통해 후대로 이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명길 [崔鳴吉]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김상헌 1570 ~ 1652
[ 金尙憲 ]
조선 중기 문신.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의 관직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저서에 《야인담록》 등이 있다.
광해군 말년에는 연이어 부모 상을 맞아 물러나 있어야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에 나가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로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난 직후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붕당을 타파하고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반정 이후에도 강직한 성격으로 누차 시사를 비판하다가,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하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姜弘立)의 관직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李貴)와 의견 충돌을 빚어 다시 낙향하였다.
1633년부터 2년 동안은 5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한 언론활동을 벌이다가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였다.
예조판서로 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다.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에 분연히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16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여 동안을 청에 묶여 있었다.
당시에도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나아가 은거하였다.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大賢)으로 추대받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수차례 은퇴의 뜻을 밝히면서 효종에게 인재를 기르고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죽은 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1661년(현종 2)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상헌 [金尙憲]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김류 1571 ~ 1648
[ 金瑬 ]
조선 중기의 문신.
인조반정 때 정사 1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이조판서 ·좌의정 ·도체찰사 ·영의정 등을 역임하면서 인조 초 ·중반의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로는 뚜렷한 정치적 입장 표시보다는 왕의 측근에서 원만히 처신하였다.
광해군 말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난 이후로는 조정에서의 출세보다 시사에 통분을 느껴,
1620년(광해군 12)경부터 이귀(李貴) 등과 반정을 도모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대장으로 추대되었고
거사의 성공으로 정사(靖社)1등공신에 책록되어 정치적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인조의 절대적 신임 속에 이조판서 ·좌의정 ·도체찰사(都體察使) ·영의정 등을 역임하면서
인조 초 ·중반의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전후에 주화(主和)와 척화(斥和) 사이에서
일관되지 못한 입장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전란 당시에는 방어를 총책임진 도체찰사의 직임을 소홀히 했을 뿐 아니라,
휘하의 군관을 주로 자신의 가족과 재물을 보호하는 데 동원하였다.
또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당시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족과 비빈들이 피난한 강화도의 방어를 책임진
검찰사의 임무를 맡았음에도 안일하게 처신하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자 그에 대한 비난은 가중되었다.
난 이후 경징은 처형되었고, 그 자신도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 사임하였다.
이후 정국이 불안하자 다시 기용되었고,
1644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공신에 책봉되었고,
봉림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로는 뚜렷한 정치적 입장 표시보다는 왕의 측근에서 원만히 처신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류 [金瑬]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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