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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Trip

[서울 종로] 야간 개장 나들이 겸 투어, 별빛 달빛 창경궁 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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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맞이하여 창경궁 야간 개방을 다녀왔습니다.

전문강사가 동행하여 창경궁에 얽힌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행사 프로그램을 신청하였습니다. (인당 12,900원)

투어는 저녁 6시에 시작해서 7시30분경에 끝났습니다.

해가 지기 전 밝을 때 시작하여 끝날때는 완전히 깜깜해 졌습니다.

https://cgg.cha.go.kr/agapp/main/index.do?siteCd=CGG 

 

문화재청 창경궁

안녕하십니까. 창경궁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 창경궁관리소는 선조들이 물려준 소중한 문화유산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온전히 물려줄 뿐 아니라, 풍요로운 문화

cgg.cha.go.kr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창덕궁의 동쪽에 위치한 궁궐로, 원래는 왕실의 작은 별궁이었던 수강궁(壽康宮)이 있었던 곳이었으나

1483년(성종 14) 성종이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확장하여 건립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서게 되면서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었고,

1980년대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궁궐의 명칭인 '창경(昌: 창성할 창, 慶: 경사 경)'은 '창성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수강궁 시기

창경궁의 자리는 원래 수강궁이라는 조선 왕실의 별궁이 있었던 자리이다.

수강궁은 1418년(세종 1)에 세워진 별궁으로,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종이 상왕(上王)으로 등극하면서 머물렀던 곳이다.

태종이 사망한 이후에도 단종세조는 수강궁을 사용했으며,

세조는 수강궁에서 별세하였다. 또한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수강궁의 중문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창경궁의 창건

1483년(성종 14) 성종은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 덕종의 비이자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를

모시고자 수강궁을 확장하여 창경궁을 건립하였다.

이때 지어진 전각은 명정전·문정전·수녕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과 양화당·여휘당·사성각 등이며

전각의 이름은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정희왕후 윤씨, 안순왕후 한씨, 소혜왕후 한씨를 모시고자 지어진 궁궐이었으나,

정희왕후 윤씨는 창경궁이 완공되기 전에 사망하여 창경궁에 모시지 못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경궁 [Changgyeonggung Palace, 昌慶宮]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투어 코스는 빨간 선을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옥천교에서 만나서 명정전-경춘전-양화당-영춘헌-춘당지-대온실을 거쳐서 옥천교로 돌아왔습니다.

창경궁은 일본사람들이 일제시대에 대부분 파괴하고

창경원으로 만들어 동물원, 식물원등으로 꾸몄다고 합니다.

아직 궁 전체 복원까지는 갈길이 멀다고 합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창경궁의 입구인 홍화문이 보입니다.

 
 
 
 
 
 
 
 

들어가자 마자 오른쪽으로 나가서 화장실을 다녀왔습니다.

화장실 가는 길에 해가 거의 지는 모습에 비친 궁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입니다.

 
 

옥천교에서 바라본 홍화문과 금천

추석 연휴 궁궐개방하여 입장료 무료여서인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창경궁 홍화문과 명정문 사이에 놓인 금천교(禁川橋)이다. 금천교란 궁궐의 안과 밖을 나누는 금천(禁川)에 놓인 다리로, 입궐하는 신하들의 마음을 씻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역할을 했다. 금천교는 창경궁 뿐만 아니라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경희궁 조선의 5대 궁궐에 모두 조성되어 있는데, 이 중 창경궁 옥천교와 창덕궁 금천교만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옥천교(玉川橋) 명칭은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지었다.

역사

1483년(성종 14) 정희왕후 윤씨, 안순왕후 한씨, 소혜왕후 한씨를 모시고자 수강궁을 확장하여 창경궁을 건립하였는데, 이 시기에 옥천교도 함께 지어졌다. 화강석으로 지어진 다리였기에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의 사건·사고로 창경궁이 전소되었을 때에도 피해를 입지 않고 원형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경궁 옥천교 [Okcheongyo Bridge of Changgyeonggung Palace, 昌慶宮 玉川橋]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명정문을 통과하여 명정전으로 향합니다.

명정전은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궁궐의 전각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창경궁이 창건되던 때인 1483년(성종 14)에 건립되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이때 지어진 건물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의 대전(大殿)은 남향으로 세웠으나,

명정전은 예외적으로 동향이다.

창건 당시 성종은 '임금은 남쪽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데 명정전은 동쪽이니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정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역사적으로는 인종이 명정전에서 즉위하였다.

명정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이다.

월대는 장대석(長臺石)의 낮은 기단(基壇)을 마련했는데 전면은 2중으로 석단(石壇, 월대)을 쌓아올리고

중앙에 돌계단을 두었으며,

그 상면에는 벽돌을 깔고 둥근 초석을 놓았다.

돌계단에는 4마리의 돌짐승을 배치하였고

가운데 계단에는 봉황을 새겨넣은 답도를 배치했다.

하지만 경복궁의 근정전처럼 돌난간을 설치하지는 않았다.

명정전 4면 기둥 사이에 모두 문비(門扉)와 상부의 광창(光窓)을 달았으나,

전면과 측면의 좌우 구석칸만은 문비 아래에 벽돌로 쌓은 낮은 벽체(壁體)가 있다.

후면에 따로 지은 툇간이 있으나 이것은 뒷날에 부설한 것이다.

마당에 깔아놓은 박석도 예전의 모습이 아니라 근래에 깔아놓은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경궁 명정전 [Myeongjeongjeon Hall of Changgyeonggung Palace, 昌慶宮 明政殿]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명정전은 즉위식, 세자 책봉식, 왕실의 혼례를 치루던 공식 행사장이라고 합니다.

서까래에는 서유기에서 따온 삼장법사,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의 상이라고 합니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습니다.

불을 비친 명정전이 더 고즈넉한 기분을 느끼게 해줍니다.

 
 
 
 
 
 

화려하게 꾸며진 왕의 좌석과

천장의 봉황장식이 특색있습니다.

둥근 기둥은 왕만 사용할 수 있던 건축양식이라고 합니다.

궁궐에서도 왕이 머무는 곳 외에는 네모난 기둥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1484년(성종 15) 창경궁이 창건될 때

명정전·수녕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양화당·여휘당·사성각과 함께 건립되었다.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편전(便殿)으로 사용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명정전과 함께 중건되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경궁 문정전 [Changgyeonggung Munjeongjeon, 昌慶宮 文政殿]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어둠이 내린 후의 전각들의 모습이 볼만합니다.

함인정, 경춘전, 환경전의 모습입니다.

경춘전은 창경궁 명정전 서북쪽에 있는 전각으로,

왕실 가족의 침전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전각의 명칭인 경춘(景: 볕 경, 春:봄 춘)은 '햇볕이 따스한 봄'이라는 뜻으로 서거정(徐居正)이 지었으며,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썼다.

역사

1483년(성종 14) 수강궁을 확장하여 창경궁을 건립하였다.

경춘전은 이때 함께 지어진 건물로 소혜왕후 한씨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춘전을 포함한 창경궁 전체가 모두 화재로 소실되었고,

1616년(광해군 8)에 중건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인해

통명전·환경전·양화당 등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경춘전은 그 피해를 면하였다.

영조 때에는 영조의 맏아들 진종(眞宗,1719~1728)과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가 경춘전에 거주했고,

이후 헌경왕후 홍씨가 이곳에서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의소세손정조를 낳았다.

헌경왕후 홍씨가 정조를 임신하였을 때

사도세자 꿈에서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나타나 경춘전으로 들어왔고,

이에 사도세자는 하얀 비단에 용을 그려 경춘전 동쪽 벽에 걸어 두었다.

정조는 즉위 후에 어머니 헌경왕후 홍씨를 자경전으로 모셨고,

자신이 태어난 경춘전에 탄생전(誕生殿)이라고 쓴 현판을 달았다.

순조가 즉위한 이후 헌경왕후 홍씨는 다시 경춘전으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순조는 경춘전의 역사와 부모에 대한 효심 등의 내용을 기록한 《경춘전기》를 편찬하였다.

이후 효명세자(훗날 문조)의 부부가 경춘전을 침소로 사용하였고,

신정왕후 조씨가 이곳에서 헌종을 낳았다.

1830년(순조 30) 대화재가 발생하여 경춘전을 비롯한 창경궁의 많은 전각이 다시 소실되었고,

1834년(순조 34)에 중건되었다.

1909년(순종 3) 일제는 창경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고,

강제로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이 이루어진 이후인 1911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경춘전은 창경원의 유물전시실로 사용되었다.

2000년 보수 공사를 통해 전시실로 사용되면서 훼손된 경춘전의의 내부와 외부를 복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경궁 경춘전 [Changgyeonggung Gyeongchunjeon, 昌慶宮 景春殿]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춘당지입니다.

원래 왕이 농사를 짓던 자리였는데,

일제시대에 연못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창경궁 대온실입니다.

1909년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철골과 유리, 목재 등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1909년(순종 3) 일제는 순종을 창덕궁에 유폐시킨 뒤

왕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는데,

창경궁 대온실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서양식 온실로,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후쿠와 하야토[福羽逸人]가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에서 시공하였으며 당시 조선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식물들이 전시되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치 및 의의

19세기 말 시작된 세계박람회 전시 건물의 형식을 따른 근대 건축물로

19세기부터 근대 건축에 사용되기 시작한 철과 유리가

우리나라의 건축물에 사용된 모습을 볼 수 있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의가 있다.

또한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던 창경궁의 비극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축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2월 6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경궁 대온실 [Grand Greenhouse of Changgyeonggung Palace, 昌慶宮 大溫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다시 옥천교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설명을 들으면서 돌아보니 1시간 반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조선문화에 대해 잘 몰랐던 상식들을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고,

역사책속에서 배웠던 왕들의 이야기와 공간이 겹쳐져서

그냥 지나치며 감상하던 궁의 모습이 더 생동감있게 다가왔습니다.

2023년 10월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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